“카다피, 최후까지 현실 직시 못 해”

“카다피, 최후까지 현실 직시 못 해”

입력 2011-10-26 00:00
수정 2011-10-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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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된 최측근 “카다피, 내전 이끌어 본 적 없어”

최근 사망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수도 트리폴리가 함락된 뒤에도 리비아 국민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고 그의 최측근이 밝혔다.

1980년부터 카다피의 개인 경호를 맡아왔던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은 25일(현지시간) 카다피가 최후의 순간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며 이 같이 말했다.

다오는 카다피가 숨진 20일에 생포됐으며, 현재 리비아 과도정부에 의해 미스라타 소재 교도소에 구금된 상태다.

다오는 카다피의 측근들이 그에게 권좌에서 물러나 리비아를 떠날 것을 권유했지만 그가 완강히 거부했다며 “카다피가 상황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600만 인구의 리비아를 40년 넘게 철권통치했던 카다피가 자신이 권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가끔은 미친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다오는 카다피가 생전에 리비아 내전을 “직접 이끌어 본 적이 없으며, 그의 아들들이 모든 전투를 지휘했다”고 말했다.

또 카다피는 전쟁에 대해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으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카다피의 마지막 날들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다오에 따르면 카다피와 그의 측근들은 시르테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과 과도정부군에 의해 포위되자 4일에 한 번꼴로 은신처를 바꿔가며 위태로운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카다피는 자신을 수호하던 친위부대의 규모가 점점 줄어들면서 불안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넷째 아들 무타심이 이끌던 친위부대의 규모는 애초 350명이었으나 일부가 도망치면서 최후에는 150명까지로 줄었다.

카다피의 사망 경위도 좀 더 명확해졌다.

다오는 20일 카다피와 자신을 포함한 그의 측근들이 황록색 도요타 랜드크루저 차량을 타고 시르테를 빠져나가려다, 나토군의 공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공격으로 부상해 정신을 잃은 다오는 이후 카다피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날 다오와 함께 붙잡힌 카다피의 또 다른 최측근 여성은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 측에 카다피가 생포됐을 당시 부상이 경미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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