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고통과 결별하는 법/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고통과 결별하는 법/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입력 2013-05-16 00:00
수정 201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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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암 환자가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암이 벌써 전이됐다니, 무슨 대책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 말을 들은 의사가 말했다. “암의 위험성이 발병 이후 치료를 시작하기까지의 시간에 비례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아주 늦은 일이란 없습니다. 단지 커지는 고통을 감당할 자신만 있다면 말입니다.”

무엇인가와의 결별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무엇’이 자신과 한묶음, 즉 체화(體化)됐음을 의미한다. 그 무엇이 가족 또는 연인이거나, 아니면 좀 더 현상적으로 말해 자신이 키운 질병이나 습관도 다르지 않다. 그런 것들이 이미 자신과 아주 강고하게 결속돼 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라거나 ‘뼈를 깎는 고통’이라는 결별의 심경은 상투적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공생(共生)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가장 비싼 대가는 죽음이다. 그것이 개인의 죽음이든 조직의 붕괴든 고통이 마침내 공생의 주체를 해체해 버리는 기생적(寄生的) 속성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암을 생각해보자. 누구나 두려워하는 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암과 결별하거나 암에 먹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게 결별해야 할 것을 껴안고 있음으로써 거기에서 비롯된 고통이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잠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심을 주저한다. 깊게 동화된 탓이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수행했다가 성추행 혐의로 풍파를 일으킨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문제도 그렇다. 이 문제를 보는 세간의 시각과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고통의 근원일 개연성을 알면서도 모든 권력이 집착했던 ‘내 편’이라는 익숙하지만 거북한 엽관(獵官)의 무모성과 결별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엽관은 직분을 수행할 전문성이나 조직적 적합성을 고민하지 않는다. 내게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했느냐를 따질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권력의 정당성과 질서가 깨지는 고통이 시작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윤씨로 대표되는 내적 고통의 요인들과 어떻게 결별하는가를 국민들이 위태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은 이전 정권에서 체험한 많은 사례를 통해 이미 원인과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성 종기가 어디 윤창중뿐이겠는가. 문제는 그런 고통의 요인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결별을 주문한다. 암 환자가 마지막으로 의사와 눈을 맞춘 뒤 비장하게 수술대에 오르듯 우리도 단순한 관음적 흥미나 그런 수준의 ‘사과’를 넘어 더 비장하고 단호하게 무언가와의 결별을 결행해야 할 때다.

무엇인가와 결별하는 일은 확실히 어렵다. 결별의 대상이 자신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지배할 만큼 익숙하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암이 그렇듯 결별에 따른 고통이 시간에 비례하는 일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근본적으로 고통의 근원을 털어내는 게 맞다. 개인의 일이 그럴진대 결별하지 못해서 얻는 고통이 국민들에게 전이되는 국가 경영의 문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jeshim@seoul.co.kr

2013-05-1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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